설진관 小考

역학,역술의 고수들이 많은 고장인 부산

김초희 2021. 9. 5. 12:46

부산에 역학의 고수들이 많이 모였다는데..


저는 청소년기에서부터 역학에 입문하여 줄곳 부산경남 지역의 역학인들을 많이 접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이론을 들을 상당수 접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전부터 사계에서 부산에는 지지를 중심으로 사주를 본다는 허무맹랑한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부터 부산의 역학인들을 접해본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항간의 소문이 틀렸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제가 1980년대와 1990년대를 회상해보면 부산에는 역학,역술인들이 참 많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6.25.전쟁 후에 영도다리아래에 역학인들이 많았다고는 하나, 실제 그곳에 역학인들이 많았던 것이 아니고, 부산에 있는 부전시장 입구의 즉결재판소가 있는 그 주변에 수십명의 역학인들이 노상에 즐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맞은편 노상에도 역학인들이 노상에 앉아 역술 상담을 했었습니다. 이것이 1980년대 필자가 목격한 부산의 연술현장입니다. 그외 부전역 ,서면일원, 부산진역 및 남포동 일대의 연인숙 간판이 붙은 곳은 대부분 장기방이라고 하여 달세를 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상당수의 역학인들이 노상이 아닌 여인숙 한칸을 얻어 철학원이라는 문패크기의 간판으로 걸고 영업하는 것이 성행했었습니다. 역학인들을 구경하기가 너무하 흔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당시 역술인들이 가장 많이 보는 교재는 사주정설, 팔자비전, 영통신서 등이 주류를 이루면서, 현재 입문서로 가장 많이 읽히는 자평진전이나 적천수보다도 훨씬 정미한 내용의 격국론이 다뤄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형론내지 물상론이라는 이름으로 사주관법이 성행하기도 했고 그 외에도 사주 네 기둥에 만족하지 않고 5주, 6주, 8주론로 구성된 이론들이 고수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인연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이론들이 너무나 많었습니다. 이 시기야 말로 한중일의 역학계의 최고 정점이었던 시기이었고 또 우리나라 최고의 역학 역술 고수들은 모두 부산에 모였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시 부산에서는 고전 명리학을 공부하기보다는 고수들의 비망록이나 비전노트를 입수하는 것이 혈안이 되어있었으며 어느 하나라도 유출되는 경우 그것은 고가로 거래되는 것이 일반화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성행했던 내용들은 오늘날 명리가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내용으로 전개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어리지만 열심히 공부했던 어린 필자가 기특해 보였는지 자신의 서재를 활짝 열어주시면서 자료를 무한으로 제공해주신 분들이 많았었습니다. 덕분에 다양한 기법들의 명리학을 접할 수 있었고, 그것이 현재 저의 역학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니다. 이 당시 고수들의 비망록에는 현재의 자평진전이나 격국론을 상회하는 수준의 격국론으로 전개되어 이 당시 비망록이나 비전노트에 수록된 분석적으로 다분화된 격국론에 길들여진 경우에는 명리학 고서는 쳐다보지도 않았었습니다.

 

당시 고수 격인 역학인들은 이런 역술 업을 통하여 가정을 꾸려갔고, 그들의 아들 딸들이 소위 일류대학을 진학하고 취직하면 홀연 사계를 떠나기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비결이라는 생각보다는 그냥 일반적인 것으로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그 당시 역학인들의 통변 기법들은 실로 엄청난 것들이었으며, 작금의 적천수니 자평진전으로 대변되는 명리학 교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수준이 높았던 것입니다. 그 당시 역학인들의 기법들을 모두 공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살아있는 역술 이론으로 가치가 있었던 것이고 그 당시 곁에서 보고 듣고 입수한 자료가 현재 필자의 역학적 바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덧붙여서, 박도사 간명지에 대하여 몇 말씀드립니다.

우선, 박도사 간명지라고 알려진 것들은 박도사의 필체가 아닙니다. 뿐만아니라 박도사 간명지의 양식은 그 당시 부산에 있는 한국역술인협회를 중심으로 하여 성행하였던 간명지 양식으로서 양식이 같다고 하여 모두 박도사의 상담내용이라고 생각하시던데 자칫 큰 오판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일부 박도사 사무실에서 나온 자료가 있을 수도 있지만, 만일 그러하다면그것은 고객에게 제공하기 위해 서기가 곁에서 받아 적은 것이 전부로써 박도사의 역철학이 온전히 담긴 것이라고 보기어렵습니다. 그래서 박도사에게 상담받았는 분들이 간명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박도사가 부산에서 이름을 알린 근간은 부부의 인연을 잘 찾아내는 것이 특기였습니다. 그래서 박도사는 인연법 고수다 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이었으니 모든 이들의 인연법을 알아내고자 혈안이 되었기 시기이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밝혀드릴 수 있는 것은 현재 항간에 돌아다니는 간명지는 박도사의 필체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그 간명지들 간 비교를 해보면 간명지들 사이의 필체또한 상이하여 신뢰도가 낮을 뿐아니라 그 간명지 양식도 당시 부산지역에 성행했던 일반적인 간명지 양식이었습니다. 그 당시 박도사가 부산에서는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보니 박도사에 대한 동경이 많았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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